필자는 오랫동안 인터뷰에서 가장 빛나는 이야기는 준비된 질문에 대한 준비된 대답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런데 수천 번의 인터뷰를 하면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했다. 진짜 이야기는 예상 밖의 순간에 나온다는 것을.
공식적인 시간이 끝나고, 보좌관들이 문밖으로 빠져나가고, 방어가 느슨해진 그 틈에서. 안전한 질문에서는 안전한 대답만 돌아오고, 안전한 대답은 결코 진실에 닿지 못한다는 것을 수백 번의 경험이 가르쳐 줬다.
대한민국 굴지의 중견기업 회장과의 인터뷰가 그랬다. 두 시간 동안 경영 철학, 글로벌 전략, 후계 구도, 사회 환원까지 그의 말은 군더더기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예정된 시간이 끝났다. 나는 수첩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따라 일어서려다 멈추었다. 혹시 조금 더 있어도 될까요? 홍보담당자들이 사라지고 공기가 바뀌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까까지 또렷하게 정제되어 있던 발음이 조금 흐려졌다.
그가 꺼낸 것은 예상 밖의 말이었다.
“저는 사실 인문학 공부를 더 해야 했는데, 그게 가장 아쉬워요.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업 책 말고, 인문학책들이요. 그 공부를 좀 더 했더라면 사람을 다루는 데 덜 실수했을 것 같아요.”
수조 원의 자산과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사람이 스스로 결핍으로 꼽은 것이 인문학 공부였다. 나는 펜을 쥔 손을 잠깐 멈추었다.
그가 계속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고 했다. 어떤 직원에게 너무 심하게 말했는데 그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뒀다고. 나중에 들으니 꽤 힘들게 지냈다고.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고. 그 말을 하면서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금전까지의 날카롭고 계산적인 눈이 아니었다. 그냥 한 사람의 눈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잘못된 것들을 돌아보는 사람의 눈.
회장실 창밖으로 서울 도심이 한눈에 펼쳐졌다. 그 넓은 창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아주 잠깐, 아주 작아 보였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어떻게 상상하는가. 냉철한 판단으로 결정을 내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
필자도 그 상상에 오랫동안 참여했다. 인터뷰 기사를 편집하면서 그들의 불안을 잘라내고, 망설임을 다듬고, 결핍을 지웠다.
독자들이 원하는 완벽한 리더의 서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완벽함을 강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 에너지는 어디선가 충당되어야 한다.
대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온다. 배우자, 자녀, 그리고 그날 그 회장이 오래 마음에 걸린다고 했던 그 직원처럼,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수많은 사람에게서.
그것이 완벽해 보이는 리더들이 치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가였다.
그 회장이 그날 꺼낸 것은 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용기였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과 자신이 놓친 것을 동시에 알고 있는 사람의 용기.
결핍을 인정하는 그 용기가 어쩌면 그를 그 자리까지 오게 한 가장 단단한 리더십이었는지도 모른다.
화려하게 포장된 성공 스토리보다 이렇게 조용히 꺼내는 한 가지 결핍이 그 사람의 진짜 크기를 보여준다.
밖에서 보면 흠 하나 없이 단단하고 화려한 영웅담 같았지만,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대화가 깊은 내면의 바닥에 다다를 무렵이면 예외 없이 그 얕은 가설이 무너지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완벽함을 연기하는 무거운 가면을 기꺼이 내려놓고 자신의 취약함을 담담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짜 거대한 크기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철옹성 같은 가면을 벗게 만드는 것은 상대를 논리로 제압하려는 날 선 추궁이 아니라,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풀게 만드는 결정적 질문 하나였다.
밖에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사람 안에도 반드시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결핍이 있다. 그것을 꺼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진짜 질문의 힘이다.
오늘 당신 주변에서 가장 단단해 보이는 사람을 떠올려 보라.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궁금한 질문 하나를 던져 보라. 그리고 대답이 나올 때까지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보라. 준비된 대답 너머의 무언가가 반드시 나온다.
대화의 주도권은 자기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는 자가 아니라,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질문을 먼저 던져 상대가 스스로 닫힌 문을 열게 만드는 자에게 있다.
오늘 저녁, 가장 가까운 사람과 마주 앉았을 때 진심을 듬뿍 담은 질문 하나를 툭 던져 보기를 권한다.
기계적인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 하루 어땠어’라는 습관적인 물음 대신, ‘오늘 하루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 언제였어’라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라.
그리고 상대가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더라도, 스스로 준비된 대답을 찾을 때까지 섣부른 판단이나 위로를 멈추고 온전히 눈을 맞추며 기다려 주어라.
당신이 내어준 그 조용한 공간과 진심 어린 질문 하나가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의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여는 가장 훌륭한 열쇠가 될 것이다.
대화의 깊이는 질문의 날카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이 담고 있는 진심과 기다림에 있다.

정진이
월간 리더스 발행·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