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대화에서 주도권을 쥐려면 남보다 더 유창하게 말하고, 더 빈틈없이 논리를 세워야 한다고 믿는다. 회의실에서든 비즈니스 협상 테이블에서든,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든 끊임없이 자신만의 정답을 제시하려 애쓴다.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음을 증명해야 인정받고, 말을 쉬지 않고 쏟아 내야만 대화의 틈을 장악할 수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과 훌륭한 통찰은 누군가의 압도적인 언변과 흔들림 없는 단언을 통해 선포되는 것이라 굳게 믿어왔다.
필자는 지난 30여 년간 언론인으로서 대화의 최전선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마주 앉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기업의 최상위 리더들부터 벼랑 끝의 끔찍한 위기를 딛고 일어선 창업자, 시대의 흐름을 날카롭게 읽어내는 각계의 거장들을 만났다. 밖에서 보기에 그들의 삶은 흠집 하나 없이 단단하고 화려한 영웅담 같았고, 세상의 어떤 풍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이 조용히 열리고 대화가 깊은 내면의 바닥에 다다를 무렵이면 예외 없이 얕은 가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이 내어놓은 가장 빛나는 통찰과 삶의 진실은 결코 잘 다듬어진 성공 공식이나 화려하고 매끄러운 언변 속에 있지 않았다.
완벽함을 연기하는 무거운 가면을 기꺼이 내려놓고 자신의 취약함을 담담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짜 거대한 크기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철옹성 같은 단단한 가면을 벗게 만드는 것은 상대를 논리로 제압하려는 날 선 추궁이 아니라,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풀게 만드는 결정적 질문 하나였다.
언젠가 한 중견기업 대표와의 인터뷰는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비서로부터 미리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뿐이었고,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손목시계를 보며 “딱 30분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나는 그 짧은 순간 계획을 바꿨다. 준비한 질문 목록을 뒤로 미루고, 그의 책상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흑백 사진 한 장에 주목했다. 젊은 시절의 그와 한 어르신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조용히 “저 사진이 인상적이에요. 어떤 분이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나를 꼿꼿하게 재보던 그의 눈빛이 사진으로 향하며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버지예요. 제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찍은 거예요”라고 답한 그는 처음으로 준비되지 않은 진짜 속마음을 꺼내기 시작했다.
공기가 달라졌고, 30분이라던 인터뷰는 두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그 사진은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본인이 보기 위한 구석에 놓여 있었고, 그것이 그 사람의 진짜 서재였다. 단지 그 사람이 혼자 볼 때 보는 것을 나도 보았다는 것을 알려준 것뿐이었다.
그 작은 관심과 질문이 나를 기삿거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보게 만들며 깊고 진실한 공간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처럼 상대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대화의 기술에는 진심 어린 질문과 함께 반드시 ‘침묵’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동반되어야 한다. 대화 도중 찾아오는 정적을 우리는 흔히 어색함이나 실패로 여겨 서둘러 빈 곳을 채우려 든다. 그러나 침묵은 결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다음 논리를 정리하거나 내밀한 속내를 꺼낼지 말지 결정하는 가장 치열한 시간이다.
질문을 던진 후 최소 3초를 고요히 기다려 보라. 그 3초 안에서 상대는 준비된 말 이상의 무언가를 스스로 꺼내 놓게 된다. 반면, 관계를 단숨에 망쳐버리는 치명적인 나쁜 질문들도 존재한다.
가장 흔한 실수는 질문 속에 가혹한 판단이나 교만한 가정을 숨겨 두는 것이다.
실패한 경험을 털어놓는 이에게 “왜 그런 선택을 하셨어요?”라고 묻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이유를 묻는 듯 보이지만, 듣는 이에게는 해명과 변명을 요구하는 날 선 심문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 상대는 즉각 방어벽을 치고 마음을 닫아버린다.
‘왜’라는 단어 대신 “그때 어떤 판단이 있으셨어요?” 혹은 “그 결정 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상대의 생각 과정을 온전히 존중하면서도 훨씬 부드럽고 풍성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타인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초연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가장 깊은 단절감과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타인과 말을 섞고 메시지를 쏟아 내지만, 정작 내 깊은 속마음을 온전히 헤아려 주고 알아주는 단 한 번의 진짜 대화에 몹시 목말라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내 처지를 유창하게 말하는 법만 치열하게 배웠을 뿐, 정작 상대의 이야기에 밑줄을 그으며 깊이 듣는 법과 섣부른 판단을 미룬 채 온전히 기다려 주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리더의 내면을 마주하며 깨달은 본질은 명확하다. 대화의 주도권은 자기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는 자가 아니라,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질문을 먼저 던져 상대가 스스로 닫힌 문을 열게 만드는 자에게 있다.
오늘 저녁,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와 마주 앉았을 때 진심을 듬뿍 담은 질문 하나를 툭 던져 보기를 권한다.
기계적인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 하루 어땠어?”라는 습관적인 물음 대신, “오늘 하루 중 가장 가슴이 철렁했거나 인상 깊었던 순간이 언제였어?” 혹은 “요즘 널 가장 진심으로 웃게 만드는 건 뭐야?”라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라. 그리고 상대가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더라도, 스스로 준비된 대답을 찾을 때까지 섣부른 판단이나 위로를 멈추고 온전히 눈을 맞추며 기다려 주어라.
당신이 내어준 그 조용한 공간과 진심 어린 질문 하나가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의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여는 가장 훌륭한 열쇠가 될 것이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가장 강력한 힘은, 유창한 입술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묻는 당신의 깊은 눈빛과 흔들림 없는 고요한 침묵 속에 있다.

정진이
월간 리더스 발행·편집인
